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문단 편집) === 게오르크 베첼 재임 시절(1930~1934)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게오르크베첼.jpg|width=100%]]}}}|| || 2대 군사고문단장 게오르크 베첼 중장 || 1930년 4월, [[중원대전]]이 한창이던 중에 중국에 부임한 베첼은 장제스에게 내전 승리를 위한 군사적 조언을 함과 동시에 시범적으로 5~6개의 엘리트 사단을 편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장제스는 이를 수용하여 1933년 최정예 사단인 87사단, 88사단, 36사단을 창설하였다. 베첼은 또한 포병부대 강화를 건의하였고 이에 장제스는 1932년 스웨덴제 고사포 48문을 수입하여 1개 포병여단을 창설하였다. 하르트만 소령과 보겔 중위를 추가로 초빙하여 신설 포병여단 산하의 2개 단을 각각 지휘하도록 하였다. 베첼은 중국군을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병과의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조언하였고 장제스는 이를 수용하여 각 병과학교를 설립, 독일군사교관들을 초빙하여 알보병이나 기껏해야 포병이나 조금 있던 중국군에게 의무대, 수송대, 치중대 등 다양한 병과들을 확충하였다. 베첼은 바우어와 마찬가지로 공군의 창설과 확충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일본 유학 경험이 있던 [[국민혁명군]] 고위 장교들이 베첼의 계획에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베첼의 계획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러한 문제는 3대 군사고문단장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이 부임하면서 해결되었다. 1934년 1월 24일 공업산품상무사(工業産品商貿公司)가 설립되었으며 1933년 시점에서 군사고문단은 100여명까지 증가하였다. 이후 [[쑹쯔원]]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는데, 독일 군사고문단이 자신이 아니라 쑹쯔원에게 충성하는 사태를 염려한 장제스에게 결국 해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